반가운 시인의 시가 실려 있다. 두 편의 시를 읽고 필사한다. 여름이 문 밖에서 기웃거리고 있다.우나기 -민구-죽은 동생이 말했다나 엄마 배 속에 있어너에게 무슨 말을 할까눈을 뜨면 눈썹에 낚이는 물고기들나는 심장을 뛰게 할 단 하나의 이름을 고민한다우리가 태어나 사라지는 것이 당신의 뜻이 아니라면강물을 휘젓는 음산한 바람이 신의 헛기침이 아니라면아무것도 빼앗지 않고 아무런 기대에 응하지 않고네가 아니면 나여도 좋을 이름을 다오기도하던 두 손을 펴고 손바닥에 적힌 이름을 떠내려 보낸다그것은 삽시간에 번지거나까맣게 익어서 떠오른다오늘 아침, 빛의 지느러미는바다에서 강으로 오고다시 강에서 바다로 흘러간다작은 파도를 따라가는 커다란 파도나는 잠에서 깨지 않은 어둠을 발로 툭툭 차며침수식물이 가득한 늪에서힘겹게 걸어 나오는 소년을 본다버섯이 들려주던 우산의 시버섯을 먹고 잠이 들었다그날 밤 우산을 쓴 채빗속을 걸었다날이 저물어 모든 상점의 불이 꺼지고약속이나 한 것처럼 어둠이 내려앉아안개가 지나가는 소리조차 시끄럽게 들렸다누군가 미행하는 걸 느꼈지만비끼리 밟는 것 외에 기척이라고는 없었다나는 포장도로 끝의 불빛이 보이는 곳으로 직진했다몇 걸음 갔을 때 우산살에 고인 빗방울이 콧잔등에 떨어졌다그리고 가시에 찔린 것처럼 오래전에 이미자리를 접은 공간이 펼쳐졌다그곳은 학교였다 거기에는 글을 가르쳐주는 교사도 없고평범한 사물이 들려주는 인생이나 가르침 따위도 없었다그저 얼룩덜룩한 무늬의 축구공이 한산한 목장에 노니는 젖소처럼운동장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나는 공을 뻥 차버렸다 공은 물웅덩이에 빠져 멀리 못 갔고갈라진 공에서 쏟아져 나온 아이들이내 얼굴로 씨익 웃었다학교를 지나 불빛이 새어나는 집 앞에 도착했다그림자는 두어 걸음 물러나서 나무에 기댔다나는 우산을 펴서 그림자에게 주고밤의 한기를 느끼며 잠에서 깼다 햇빛이 목을 간질인다. 바람은 때때로 불어와 나를 앞서 걷게 한다. 비가 오지 않아 저수지는 바닥을 드러냈고 푸른 강은 빛을 잃어갔다. 나를 뒤따라 오는 버섯 모양의 우산, 비는 새벽에 잠깐 창문을 두드릴 뿐이었다. 화난 얼굴로 맞이하는 아침에는 학교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낯설었다. 가벼운 울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유월의 늦은 밤. 먹으면 잠이 올 것이라는 주의가 붙은 약을 먹고 소년에게 꿈속에서 만나자 인사를 한다. 김금희의 『경애(敬愛)의 마음』을 읽는다. 장편 연재 두 번째 이야기. 경애와 상수는 조금씩 친해지고 있다. 1편에서 상수는 경애에게 좀 친해집시다라고 직설적으로 말한다. 경애는 그러라고 시큰둥하게 말할 뿐이었다. 상수가 회사에서 겪는 시련 때문에 그 둘은 가까워지고 있다. 인도 바이어와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경애가 영어 번역과 PPT 작업을 해준다. 계약은 무산되고 그 계약은 상수가 좋아하는 유정이 체결한다. 상수는 제대로 항의도 못하고 사무실에서 방출될 위기에 처한 화분에만 신경은 쓴다. 경애는 상수의 차를 타고 가는 것보다 오후의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사무실을 찾아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상수의 차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버려지지 않았다. 경애는 버리지 못하고 물건들을 가지고 있는 그 마음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영화 동아리에서 만난 E와의 추억과 마음. "나는 그 영상을 아주 솔직하게 찍었어."조용히 듣고 있던 E가 반대는 하지 않고 다만 약간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거기에는 내 마음이 다 담겨 있어." 그러면서 E가 사람들 몰래 경애의 손을 살짝 잡았다 놓았기 때문에 경애는 그 말을 할 때의 E의 톤, 목소리, 말투를 다 기억했다. 거기에는 내 마음이 다 담겨 있다는 말. 맥주와 팝콘이 몇 번 더 돌고 경애는 전화를 하기 위해 힛트호프에서 나와 역 앞에 있는 공중전화로 갔다. 낮고 소극적이게 자신의 마음을 전해오는 E를 그 후 경애는 만날 수 없게 되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만나는 일, 마음을 이해하고 알아채는 일들. 경애는 그 마음의 무늬를 헤아리다가 시간을 놓치고 현재의 시간에서 발목을 잡힌 채 살아가고 있다. 돈 내고 나가라,라는 말에 갇힌 경애의 과거. 김금희의 소설에서 내가 발견한 건 조각으로 부서진 누군가의 마음들이었다. 경애의 마음과 상수의 마음.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자 아픈 가슴 때문에 페이지를 넘길 수 없는 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 들. 소설은 일상을 사는 우리의 흩뿌려진 마음을 이어 붙이려는 김금희 작가의 위로와 격려로 가득하다. 이청준 선생의 「인문주의자 무소작 씨의 종생기」의 제목을 빌려온 듯한 구병모의 「어느 피씨주의자의 종생기」는 작품을 대하는 대중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풍자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SNS 계정을 팔로우 하면서 P 씨의 행적과 작품을 엿보는 자의 입장에서 쓰인 소설은 작가와 작가를 둘러싼 주변 세계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밝혀지는 P 씨의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되면 이 소설의 씁쓸한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김인숙의 「아주 사소한 히어로의 특별한 쓸쓸함」은 영웅이 될 수 없는 그러나 영웅이 되고 싶은 아버지들의 이야기다. 이혼한 아들에게 비싼 피규어를 사줄 수 없는 아버지.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는 K의 손을 잡고 이동한 버스 안에서 목격하는 아들의 눈물. 늦은 밤 버스를 타고 퇴근하는 세상의 모든 사소한 히어로들. 그들이 느끼는 특별한 쓸쓸함은 우리가 본 것일까, 느낀 것일까. 소설이 끝나고도 의문은 오래 남는다. 정용준의 「눈구름』은 죄의식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쌍둥이 동생의 잘못된 행동으로 숨어 살아야 하는 해영과 엄마. 일하는 곳에서도 드러내놓고 자신에게 보이는 적의를 받아들여야 하는 해영은 의사를 찾아간다. 죄책감이 사라진 상태에서 해영은 자유를 느낀다. 모든 적대감과 분노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잃어버린 동생의 표정을 되찾는다. 봄과 여름 사이, 우리는 변화를 겪었다.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합법적인 허락을 받았고 이름표를 붙이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을 얻게 되었다. 감사와 보답으로 선물을 주고 책을 추천해줄 수 있는 관계를 만들었다. 모두의 마음이 모여 우리의 마음을 보여줄 수 있었다.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느라 지쳐 있었고 자주 속이 상해 울고 싶었다. 변화하자 우리의 마음은 햇빛 한 줌을 얻을 수 있었다.
창작과비평 2017년 여름호가 출간되었다. 비평, 창작 등 문예지로서의 역할과 함께 ‘장미대선’과 새 정부 출범을 맞아 시대전환의 과제들을 짚는 다양한 기획까지 풍성하게 담았다. 시민 각자가 ‘촛불의 일상화’를 통해 적폐를 청산하고 희망을 실현하는 데 한몫을 해야 하는 이때, 시의성과 흥미를 갖춘 본지의 논의들이 그 길에 함께하고자 한다.
창작과비평 176호(2017년 여름호) 목차
책머리에
김종엽 / 촛불혁명의 새로운 단계를 향하여
특집_페미니즘으로 문학을 읽는다는 것
백지연 / 페미니즘 비평과 ‘혐오’를 읽는 방식
김수이 / 다시 새로운 부작용의 시간이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의 시적 경로들
차미령 / 너머의 퀴어: 2010년대 한국소설과 규범적 성의 문제
기획_문재인정부와 시대전환
이남주 / 새 정부가 시대전환에 이바지하려면
전성인 / 지금 바로 경제적 전환을 시작하자
정현곤 / 한반도 평화, 남북관계에서 길을 찾아야
시
김경미 / 역무원을 찾아서 외
김준태 / 노래, 물거미 외
김행숙 / 우리를 위하여 외
문성해 / 서설홍청 외
민 구 / 우나기 외
박경희 / 청명 외
박판식 / 사랑의 목소리로 외
안도현 / 안동 외
안미옥 / 멀고 먼 통조림 외
유용주 / 겨울밤 외
이동우 / 종북 놀이 외
장철문 / 통증에 대하여 외
조혜은 / 봄비 외
소설
김금희 / 경애(敬愛)의 마음 (장편연재 2)
구병모 / 어느 피씨주의자의 종생기
김인숙 / 아주 사소한 히어로의 특별한 쓸쓸함
정용준 / 눈구름
대화
박근용 석진환 임수빈 정연순 / 시대의 과제, 검찰개혁
산문
권여선 / 촛불과 태극기
현장
박원순 / 촛불이 바꾼 것과 바꿔야 할 것
정영신 / 국가와 군사기지에 대항하는 공동체의 투쟁: 성주의 반기지운동에 관한 시론
논단
원 톄쥔 / 글로벌 위기와 중국의 대응전략: 하나의 추세, 두가지 보수, 세가지 전략 (김진공 옮김)
김태우 / 6월항쟁의 재구성: 촛불의 관점에서 돌아보다
작가조명 박상순 시집 슬픈 감자 200그램
김현 / 우리 모두, 상순할 것이다
문학초점
손택수 윤성희 정주아 /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문학평론
이정진 / 토머스 핀천과 1960년대
김나영 / 통감하는 주체, 유무의 경계 너머의 말들: 최근 시의 주체에 덧붙여
촌평
백무산 / 조영관 전집
이옥순 / 마흐무드 맘다니 규정과 지배
류 신 / 토마스 만 로테, 바이마르에 오다
김동수 / 백승욱 생각하는 마르크스
이동기 / 문승숙 외 오버 데어
이은선 / 김호동 한 역사학자가 쓴 성경 이야기 · 김기흥 역사적 예수
하대청 / 마리 루티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
양효실 / 에르베 기베르 유령이미지
독자 리뷰
노태훈 / 믿을 수 있는 소설
이승준 / 일상의 광장을 이루는 길잡이
제10회 창비장편소설상 발표
수상작 없음
창비의 새책
카테고리 없음